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산 전투 (문단 편집) == 전개 == 명나라의 구원군과 청나라의 요격군 사이의 첫 번째 전투는 송산과 금주 사이에서 일어났다. 지도를 보면 송산은 금주에서 남쪽으로 10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고 두 성채 사이에는 산악 지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1641년 6월 교전이 벌어졌다. 지르갈랑이 지휘하는 청군은 대패를 당했고[* 40,000명 중 무려 38,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4차례나 포위되었으나 겨우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명군도 상당한 피해를 봤던 것으로 보이는데, 속전속결을 독촉하던 숭정제의 압박을 받고 있었던 홍승주는 금주로 계속 나아가려고 했으나, 명군의 진격은 청군이 곳곳에 설치해 놓은 목책 등의 장애물에 의해 지지부진했다. 지르갈랑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 소식을 들은 청태종이 직접 2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와서 전선에 합류했다. 당시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청나라의 입장으로는 전쟁을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고 청 태종도 장기전을 원하지 않았으나,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 등 부하장수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히려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로 했다. 이 전략에 따라 청군이 명군의 전방에 소규모 공격을 지속하는 사이 일부의 청군이 명군의 배후로 돌아가 명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특히 송산성 남쪽으로 25km 가량 떨어져 있는 필가산(筆架山)에 있었던 명군의 보급기지가 함락되어 청군의 손에 넘어갔고, 명군은 청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해 8월 포위된 명군은 결전과 후퇴 사이에서 하나를 결정해야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홍승주는 최후의 결전을 계획했지만, 휘하의 장군들은 반대하면서 보급을 위해 산해관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공포에 질린 여러 장군들이 제멋대로 퇴각해버렸고 홍승주의 수중에는 수만 명의 병력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편 청태종은 명군이 퇴각한다는 첩보를 전해 듣고는 명군의 퇴로에 [[복병]]을 배치해 두었는데,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후퇴하던 명군의 장군들과 병사들은 청군의 복병에 걸려 궤멸되었고, 이들 중에 후퇴 계획을 면밀하게 세운 오삼계를 포함한 30,000명 가량만이 산해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혹은 오삼계 휘하 10,000명 정도만 제대로 된 퇴각을 했고, 남은 20,000명 정도는 붕괴된 상태에서 어떻게든 복귀했다고 봐야 한다.] 홍승주는 남은 군대를 이끌며 송산성으로 밀려들어갔으나 여기서도 다시 포위되었다. 명군은 포위를 뚫으려고 여러 차례 야간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결국 홍승주의 부장이었던 하승덕이 몰래 항복하고 청군을 맞아들이면서, 1642년 2월 송산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많은 명나라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송산에서 죽었으나, 홍승주는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청태종의 극진한 요청으로 인해 청나라에 귀순했다. 한편 고립되어 금주를 수성하고 있었던 조대수는 식량이 떨어지고 아사자가 속출하여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송산성이 함락된지 1개월도 지나치 않아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이때 청나라의 장수들 중에서는 이미 한 번 배신한 조대수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청태종은 그를 관대하게 용서했고, 이후부터 조대수는 충실한 청나라의 신하가 되어 대명 공격에 종사했다. 여담으로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조선]]도 원병을 보내어 싸웠다. [[김화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류림(柳琳)이 지휘한 조선군은 비록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선 [[포수(동음이의어)|포수]]들은 뛰어난 [[저격]] 실력으로 명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 볼모로 잡혀와 있었던 [[소현세자]]도 금주에 와서 조선군을 독려했다.[[http://egloos.zum.com/gil092003/v/10009469|관련 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